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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September 13th, 2004 by 라띠



최근에 여기저기서 정약용의 이름을 부쩍 많이 접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양장은 아니었지만… 튼튼한 제본에, 믿을만한 출판사, 좋은 종이질과 컬러인쇄가 맘에 들었다. 그리고 뭔가 특별한 만남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별 망설임 없이 두 권 3만원에 육박하는 책을 사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목민심서가 그의 저서라는 것, 조선시대 실학자라는 것, 수원성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 정도밖에 몰랐으나… 이 책을 통해 인간 정약용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그는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었다. 한가지 분야에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모든 분야에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사서삼경, 성리학, 경제, 정치, 문학, 음악, 미술, 의술, 건축 등 그 시대 거의 모든 학문에 뛰어난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 시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조와 천재 이가환에게서 조차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분야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500권의 저작을 남겼으니 그의 학문적인 성과는 전무후무하다 할 수 있다. 현 재까지도 그의 저작을 모두 번역하지 못했다고 하니…(열악한 연구기반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 저작의 방대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그는 기존의 학문을 그저 연구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학문으로 변모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미래지향적인 실학사상의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진정 위대한 제너럴리스트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었다. 지방관시절에는 온전히 백성들을위한 정책을 펼침으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훗날 곤란한 지경에서 백성들의 호소로 빠져나올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실학사상엔 백성들에 대한 걱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모든 기준은 백성들이었다. 얼마나 백성들을 배부르고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모든 사상의 기준이었다.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문직(과학자, 기술자)을 중시하여 많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나친 평등주의의 폐단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치밀함을 보인 것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유배되어있는 동안에도 자식들의 학문을 위해 거의 책이 될만큼 많은 편지를 보냈고, 흑산도에 유배된 형의 건강이 나빠지자 개를 잡아 요리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편지로 전하는 장면은 정말 눈물겹다. 어린 자식이 죽자 절절한 애도의 시를 읊는 장면 역시 그렇다. 천주교도로 오인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천주교도인 셋째형 약종을 배신하지 않는 뜨거운 형제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여러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개혁 군주 정조와의 학문적인 교류, 인간적인 사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는 점. 만약 정조가 아니었다면 다산은 이렇게 후세에 기억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조가 죽자, 정약용도 거의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정말 그렇다. 정조의 죽음을 그토록 애통해 한 이유가 있었다.

정약용이 암행어사를 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수원성 축조를 위해 운반 도구 등을 직접 설계, 제작하였고 도시설계과 건축 감독까지 맡아서 했다. 귀양생활 막바지에는 주역에 심취하여 과거의 잘못된 주역풀이를 올바로 고쳤다. 주역이 점보는 책이 아닌 국가경영의 대계를 가늠하는 철학서로서 제대로된 위상을 되찾게 했다.

또한 둘째 형 약전과는 서로 각자의 유배지에 떨어져 있었지만 편지를 통해 지속적인 학문적 교류를 나눴다. 정조사후에 실로 유일한 친구이자, 조언자이자, 독자였다. 그런 형님의 죽음에 저작을 모두 불태울 생각까지 했다하니… 그에게 형 정약전의 무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셋째 정약종은 네 형제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가장 강한 신앙심을 가졌었다. 그가 쓴 주교요지의 내용은 현대 기독교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다. 아마 조선시대 몇 안되는 신앙인이자 신학자가 아닌가 싶다.

시대를 변화시킬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시대는 아직 변화를 수용할 만큼 유연성이 없었다. 노론의 공세속에서 속절없이 꿈을 접고 귀양길에 오르는 심정이 어땠을까?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자식이 죽고, 의지하던 형을 여읜 암담함을 어떻게 삭였을까?

극한의 고통속에서도 그는 학문으로 일어섰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백권의 저작은 그의 귀양생활을 통해서였다. 오히려 귀양살이가 학문적 성과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앞두고는 ‘자 찬묘지명’을 편찬한다.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미화되거나 왜곡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후세에 자신의 삶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시대가 왜곡되어 있었기에 시대를 못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둠의 시대에 왜곡되지 않은 한줄기 곧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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